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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

이집트문명 히타이트와 람세스

by PPNN 2020. 3.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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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문명

 

기원전 1500년쯤 지중해의 금속 기술자들은 주석과 구리를 섞으면 청동이라는 단단한 금속이 생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지중해 사람들은 영국, 스칸디나비아까지 가서 청동을 다른 물품으로 바꿨습니다.  기원전 1500년경은 이집트 제국의 전성기였습니다. 이집트는 활발한 교역 활동을 통해 여러 지역과 교류했습니다. 

 

투트모세 3세 이후 세 명의 왕을 더 거치는 동안 이집트 제국은 별 탈 없이 발전했습니다. 이집트의 파라오들은 외국 종교를 존중하고 외국 공주와 결혼하는 방법으로 이웃 국가와 사이좋게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기원전 1370년쯤에 새로 파라오가 된 아멘호테프 4세가 충격적인 선언을 했습니다. 이집트에는 많은 신이 있었는데 둥근 해를 유일무이한 신이라고 선언한 것이었습니다. 즉 유일신을 믿으라는 것이죠. 아멘호테프는 이 태양신을 아톤이라고 불렀고 자기 이름도 아켄아톤으로 바꿨습니다. 

 

예전 아모세 1세는 제국을 건설하면서 테베의 신이었던 아몬을 모시는 신전에 이집트의 모든 신을 모아놓았습니다. 아켄아톤은 아몬 신전을 폐쇄하고 아톤을 기리기 위해 아케트아톤이라는 새로운 수도를 지었습니다. 아멘호테프는 태양 숭배에 힘을 썼지만 지방에서는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제국은 분열되었고 왕실도 콩가루집안이 되었습니다. 아켄아톤(아멘호테프 4세)는 조카 세켄레와 눈이 맞았고, 왕비 네페르티티는 집을 나갔습니다. 나중에 세켄레와 아켄아톤이 모두 죽자, 네페르티티는 왕위를 어린 투트안크아톤에게 넘겼습니다. 

 

투트안크아톤은 자신의 이름을 안크아몬으로 바꿨지만 스무 살도 안 되어서 요절했습니다. 과부가 된 왕비 안크에센아몬은 몰래 히타이트 왕 수필룰리우마스에게 편지를 보내 그의 아들과 결혼하겠다는 제안을 했습니다. 하지만 수필룰리우마스가 보낸 아들은 아몬을 숭배하는 첩자들의 손에 죽었습니다.

 

결국 아이라는 인물이 왕비와 왕위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수필룰리우마스는 아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 가나안으로 공격하여 이집트의 노른장 땅을 빼앗았습니다. 

 

히타이트와 람세스

이집트문명 포스팅에서 알아볼 다음 내용은 히타이트입니다. 가나안을 차지한 히타이트는 여러 차례 이집트를 공격했습니다. 60년동안 이집트는 히타이트를 몰아내려고 애썼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기원전 1290년경 젊은 파라오가 히타이트에게 따끔한 맛을 보여주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가 바로 람세스입니다. 

 

람세스는 해안선을 따라 보급로를 확보하고 군대를 양성했습니다. 히타이트 왕 무와탈리스는 이집트가 군대를 양성한다는 것을 알고 군대를 집결시켰습니다. 

 

기원전 1288년에 이집트 군 4개 사단이 이집트를 출발하여 히타이트가 차지하고 있는 카데시로 진격했습니다.  히타이트 군대는 숨어서 기다리다가 이집트 군이 방심한 틈을 타서 공격했습니다. 람세스가 이끄는 군대는 죽기 살기로 싸웠고 엄청난 피해를 입었지만 결국 승리했습니다. 하지만 람세스는 겨우 되찾은 땅을 지키느라 또 다시 15년의 세월을 전쟁터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결국 그는 무와탈리스 왕과 평화 조약을 맺었고 카데시를 히타이트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리고 히타이트 공주를 왕비로 맞아들였습니다. 무려 67년 동안 왕위를 지켰던 람세스는 이집트 전역에 자신의 업적을 기르는 기념물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투탕카멘의 무덤

1922년 고고학자 하워드 카터는 이집트의 오래 된 도시 테베의 골짜기에서 6년 동안 찾아 헤매던 투탕카멘의 무덤을 찾았습니다. 무덤 안으로 들어간 카터는 크게 놀랐습니다. 다른 파라오의 무덤과는 달리 투탕카멘의 무덤은 미라부터 유물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원전 14세기경 투탕카멘은 어린 나이에 죽은, 이름 없는 파라오였습니다. 하지만 완벽하게 보존된 무덤 덕분에 이집트의 파라오 중에 매우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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